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문단 편집) === 전쟁 전반(1919.02-1920.04) === || [[파일:1024px-PL-RU_war_1919_phase_I.svg.png|width=100%]] || [[파일:1024px-PL-RU_war_1919_phase_II.svg.png|width=100%]] || || '''1918~1919년 소비에트의 발트 3국 및 벨라루스 방면 공세''' [[빨간색]] 화살표가 붉은 군대의 진로이다 || '''1919년 발트 3국 및 폴란드의 반격''' 흰색 화살표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연합군, 검은색 화살표는 리투아니아군, 파란색 화살표는 폴란드군의 진로이다 || 사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시작점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고 독일군이 동유럽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권력의 거대한 공백이 형성되었고, 이 틈을 타서 민족주의 세력과 볼셰비키, 백군 세력이 각지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고받고 싸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분쟁은 현지의 자생적 정치세력이 각국 중앙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게 아니라, 일단 권력탈취를 '''알아서''' 시도하고 사후승인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전쟁의 정확한 시작일을 논의하는 것이 골치아프게 된다. 그 중에서도 [[빌뉴스]]는 특히 분쟁의 여지가 많은 도시였다. 빌뉴스는 역사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지만 [[폴란드 분할]] 이후로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고, 종족적으로는 폴란드계와 유대계가 다수인 도시였다. 그러므로 1차대전이 끝나고 빌뉴스 영유권을 두고 다투는 나라는 4개국에 달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러시아. 여기서 벨라루스가 나온 이유는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도 자국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후신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인구 대부분이 [[루스인]]인데다 행정언어도 [[루테니아어]]를 사용했다. 러시아도 벨라루스를 멸망시키고 괴뢰국인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919)|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여 우회적으로 영토분쟁에 개입했다.] 그러므로 빌뉴스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도 치열하게 벌어졌다. 1918년 3월 빌뉴스는 [[리투아니아]] 정부의 수도로 기능했지만 이듬해 1월 1일 독일군의 철수를 전후로 하여 동유럽 현지의 각 세력은 빌뉴스의 차지를 시도했다. 폴란드계는 신생 폴란드에 합류할 목적으로 1918년 9월 독자 군 창설을 시작했고, [[볼셰비키]]는 12월 15일 "노동자 평의회"를 조직했다. [[독일 제국군]]이 철수하기 직전 12월 29일 폴란드 정부는 해당 지역의 폴란드계 자위대에 해산 및 폴란드군 합류를 명령했고, 실제로 자위대는 폴란드군 단대호를 배정받고 자위대를 지휘하던 각 장교들은 폴란드군의 계급과 직책을 부여받았다. 독일의 철수시도를 두고 도시를 볼셰비키에게 넘기려는 시도라고 판단한 폴란드군은 31일 행동을 개시하여 독일군의 무장해제를 시도하고 빌뉴스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때 리투아니아 정부는 빌뉴스를 떠나 [[카우나스]]로 임시 천도한다. 협상 끝에 독일군은 빌뉴스 일부를 폴란드군에 양도하는 대신 일부 시가지와 철도역은 자기가 통제하기로 했다. 볼셰비키의 노동자 평의회가 폴란드군의 시도를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1월 2일에 항복하고 무기고를 압수당했다. 빌뉴스에서 폴란드와 볼셰비키의 교전이 벌어지자 곧바로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서방 공세]]를 벌이던 붉은 군대 서부전선군 예하 16군이 개입하여 폴란드군의 저항을 무력으로 분쇄하고 5일 빌뉴스를 점령했다. 폴란드군은 인근 지역으로 후퇴했다가 독일군에 억류되어 무장해제되고 이후 폴란드 정부 통제 지역으로 이송되었다. 빌뉴스를 장악한 볼셰비키는 2월 27일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여 자기 괴뢰국인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918)|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919)|소비에트 벨로루시]]를 서로 병합했다. 그리고 빌뉴스에서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서부 전역에서 볼셰비키의 진격에 반발한 폴란드계 및 벨라루스계 주민들이 자위대를 조직하여 1월 내내 붉은 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이 빌뉴스 전투(1918.12.31-1910.01.05)가 발발한 1918년 12월 31일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시작으로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잡는 전쟁의 시작일은 1919년 2월 14일이다. 이날 폴란드군은 [[벨라루스]] 베레자 카르투스카(Bereza Kartuska)에 주둔하던 붉은 군대를 공격하여 80명을 사로잡았다.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에 의하면, 1919년 초 전선에 배치된 폴란드군은 8만, 붉은 군대는 5만 정도 되었다. 3월 폴란드군은 네만 강[* 오늘날 벨라루스 서부에서 발원하여 리투아니아 중서부를 흐르고 [[쿠로니아 모래톱|쿠로니아 석호]]로 빠져나가는 국제하천.]을 도하하여 [[핀스크]]를 점령했다. 폴란드의 공세는 4월 16일에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벨라루스 서부의 주요 도시들이 폴란드군에 점령되었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점령했던 빌뉴스도 19일에 폴란드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때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 측에 반환을 요구했다가 씹혔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피우수트스키는 정치적으로 잡음을 겪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때 '''전(前) [[리투아니아 대공국]]'''이라는 명칭을 넣은 선언문을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포고했는데(정복자 폴란드라는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작업으로), 이때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민족민주주의파(Narodowa Demokracja)는 '''"님 지금 뭐함? 리투아니아 대공국인지 뭔지 생까고 그냥 [[폴란드|우리나라]] 영토라고 했어야지!"'''라고 비난하며 피우수트스키를 향해 '''반역자''' 운운하기까지 했다.(...)] 아직 [[백군]]과의 싸움이 더 급했던 소비에트 러시아는 빌뉴스 일대에서 퇴각했다. 5월 말-6월 초에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반격을 벌여 전선이 [[볼린(동음이의어)#s-1|볼히니아]]와 [[갈리치아]] 근방에 형성되었지만, 8월 폴란드는 벨라루스 중부 방면으로 다시 공세를 벌였다. 8일 [[민스크]]를 점령한 폴란드군은 8월 말 베레지나 강,[* [[드니프로 강]]의 지류. 1812년 11월 3일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육군|프랑스군]]이 도하하기 직전 러시아군에 궤멸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9월 2일 [[다우가바 강]]까지 진격했다. 벨라루스 방면의 북부전선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방면의 남부전선에서도 폴란드군은 빠르게 진격, 폴레시에 습지[* 오늘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위치하며, 서로는 폴란드 국경에서 동으로는 러시아 국경까지 이어진 거대한 [[습지]].] 서부와 볼히니아를 점령하고 [[루마니아 왕국]]과 접경했다. 그러나 이때 피우수트스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비슷한 시기 모스크바로 총공세를 펼치던 [[안톤 데니킨]]의 지원 요청을 두 번이나 거절한 것이다. 피우수트스키에게 있어 기본적으로 [[러시아 제국주의|러시아 제국주의자]]인 데니킨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있어 방해되는 존재였고[* 실제로 데니킨은 폴란드는 몰라도 우크라이나의 독립만큼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양반이 모스크바로 총공세를 벌이기 직전 밑바닥을 다지겠답시고 벌인 일이 우크라이나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네스토르 마흐노|마흐노우슈치나]] 세력을 공격한 것이었다. 마흐노우슈치나는 이후 모스크바 인근까지 진격한 데니킨의 보급로를 개발살내며 처절히 복수한다.], 무엇보다 볼셰비키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데니킨과 굳이 동맹을 맺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11월 초에는 양측간의 분쟁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협상이 열렸지만, 데니킨의 모스크바 공세를 쳐부순 소비에트 러시아는 12월 폴란드가 제시한 조건들을 거부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키예프를 재점령(12월 12일)한지 이틀 후, 피우수트스키도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협상을 파기했다. 30일에는 같이 대소전쟁을 벌이던 [[라트비아]]와 군사동맹을 체결, 이듬해 1월 초 라트비아 남동부 [[다우가프필스]]를 점령하여 라트비아에게 양도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와 볼셰비키 간의 전쟁은 전면전이라기보단 국경분쟁에 가까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